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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눈에 보는 세계철학사 - 허훈 저 | 양철북 | 2015년 12월 10일
밀레투스의 철학자들은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봅니다. 이는 그동안 신을 만물의 근원으로 해석한 신화의 세계에서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철학의 시작입니다. 고대 자연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흔히 알고 있듯이, 만물의 근원이 물이다, 공기다 하는 결론이 아닙니다. 그들이 '만물을 구성하는 물질이 대체 무엇일까?'라고 물은 것이며, 그걸 밝히기 위해 실험과 추론이라는 방법을 쓴 것입니다.
중세에는 나라는 존재는 누구인지, 세계는 어떻게 존재하는지(존재론)에 대해 신이 설명해줍니다. 또 무엇이 진리인지, 어떻게 진리를 알 수 있는지의 문제(인식론)는 신이 보증을 섭니다. 나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가치론)도 신의 말씀에 따라서 살면 됩니다. 그런데 신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근대에 새로운 난제들이 등장합니다.
신을 흔히 '세계를 창조한 무한자'라고 합니다. 그런데 신이 무한자를 말 그대로 '한계가 없다'면, 신 바깥에는 아무것도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있는 이 세계가 신 바깥에 있다고 한다면, 신은 유한자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근대철학이 당면한 문제는 '주체와 객체 사이에 진리를 판단해줄 제3자가 없다'는 것이었죠. 중세에는 신이 그것을 보증해주었지만, 이제 신을 배제한 상황에서 물질적 실체를 인정하면 그것이 지식과 일치하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문제를 아예 없애기 위해 버클리는 하나를 없애 버립니다. 로크가 남겨둔 물질이라는 실체를 없애 버리는 겁니다.
1950년대 이후 20여년 이상 정치 이론 및 철학은 효율성과 실효성이라는 두 요소를 기반으로 삼아왔는데, 롤스가 이를 정의로 바꿔놓은 겁니다. 롤스는 "사상체계의 제1덕목이 진리이듯이, 사회제도의 제1덕목도 정의"라고 합니다.
니체는 삶을 이렇게 말합니다. "소유함과 더 소유하고자 함, 한마디로 표현해 성장!" 쇼펜하우어와 달리 세계의 본원은 다만 살려고 하는 생에의 의지가 아니라, 보다 나은 삶을 바라는 '힘에의 의지(Der Wille zur Macht, 보통 권력에의 의지로 옮김)'라고 봅니다.
키르케고르가 추구한 것은 삶의 고뇌를 해결해 줄 구체적인 진리입니다. 그런 진리가 있을까요?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실존의 가장 깊은 뿌리로 엉켜있는 것, 말하자면 그것을 통해서 내가 신적인 것에 달라붙을 수 있는 것…… 나는 그것을 추구하겠다."
생철학이 생의 의의, 가치, 본질을 파악하고 삶을 역사적, 상대적으로 파악하려고 한 데 비해, 실존주의는 삶을 개별적인 것, 현실적인 것, 상대화할 수 없는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 생철학이 삶 일반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면, 실존주의는 개인의 삶에 관심을 가집니다.
후설은 '물체'와 '나타나는 현상'을 구별합니다. 그리고 물자체에 대한 판단을 중지하고 오로지 현상에만 집중합니다. 애당초 알 수 없는 사물자체에 대해서는 왈가왈부 따지지 말라는 것이죠. 이것이 후설의 유명한 '판단 중지'입니다.
(...)
판단을 중지한 이후에 세계를 바라보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세계는 달라질 게 없죠. 다만 "의식에 떠오르는 세계"만이 존재합니다. 그러면 애초의 문제, 즉 물자체와 관념의 차이에서 생긴 고민이 사라집니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일정한 생활양식과 규칙에 따라서 영위되는 행위"라고 결론 내리면서, 이를 "언어게임"이라고 부릅니다. 언어에는 본질이나 정의 같은 것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언어에 관해서 알려거든 의미를 묻지 말고 사용을 물어라"라고 말합니다. 결국 "철학자에게는 철학자의 언어게임이 존재"할 뿐입니다.
많은 탈근대 사상가들이 이성을 근대의 산물로 규정하고 철저하게 비판하지만, 하버마스는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되묻습니다. 즉 근대 이성 비판 자체가 역시 이성에 의한 것이라고 하버마스는 주장합니다.
푸코에 따르면, '진리는 존재한다', '인간은 진리를 알 수 있고 또 알아야 한다'는 전혀 근거가 없는 말입니다. 진리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담론에 의해 규정되는 하나의 지식일 뿐이기 때문이죠.
근대 경험론의 완성자 흄은 자아를 지각의 다발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경험한 내용뿐이라고 하면서, 독립적인 요소 내지 부분의 총합이 그대로 전체라고 생각합니다.
모든 현상은 인연 따라 일시적으로 모이고 나타날 뿐 생기는 것이 아니며(불생), 일시적으로 흩어지고 사라질 뿐 소멸하는 것도 아닙니다(불멸), 또한 모든 현상은 영원한 것도 아니고(불상), 끊어지는 것도 아닙니다(부단). 그래서 모든 현상을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하나가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불일), 현상이 끊임없이 이어지므로 다른 것도 아닙니다(불이). 결국 모든 중생이 이 세상에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지만, 모든 것이 인연 따라 모일 뿐 어디에서 온 것이 아니며(불래), 어디로 가는 것도 아닙니다(불출).
꽃이 피고 지고, 사람은 나고 죽습니다. 용수는 그것은 인연의 생멸이지 실체적 생멸이 아니라고 합니다. 실체적 생멸이란 없습니다.
1.
철학은 과학의 시녀라는 표현이 나오는 요즘이다.
인공지능,
그것의 능력에 대한 논의가 무르익은 이후에는
그들의 권리에 대한 논의가 뒤따를 것이다.
인공인격을 말해야하는 그때
우리는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의로 돌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함의한다.
'어떤 철학들은' 그 근거를 논하는 과정이다.
'윤회하는 자아', '시민사회의 구성원', '기계론적 인간' 등
다만 주목해야하는 인간(혹은 개인)의 정체성은 무엇인지에 대한 좁혀질 수 없는 시선의 차이가 있고
왜 그러한 정체성에 주목해야 하는지의 논거가 있다.
2.
'어떤 철학들은'
'절대적인 진리 그 자체'에 대한 갈구 혹은
인간은 그것을 손에 쥘 수 없다는 선언으로 이루어져 있다.
후자를 논함에 있어서
언어에 집중하면 '언어게임'에 참여하게 되고,
오성의 능력에 집중하면 '에포케'를 뒤따르게 된다.
3.
철학을 통해 신학의 새 기틀을 마련하고서야 말한다.
"철학은 신학의 시녀이다Philosophia ancilla theologiae."
신학의 체계를 다짐에 있어서 철학을 통한 answer first 어프로치를 취한 것이 아니었나.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이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과학의 방법론에 노출된 자연의 일부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고 말한다. - 『물리와 철학』,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저, 조호근 역, 서커스(2018)
사상적 공여자를 시녀라고 한다면
본성론에 앞서 인식론이 20세기에 이미
과학의 시녀 역할을 했을 것이다.
4.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자면, 친절하다. 독자를 위한 글쓰기를 오래 고민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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